칸트의 인식조건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공간의 감성형식 / 범주의 지성형식 / 이성의 종합을 인식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상은 모두 이미 한 번 인식구성틀을 거친 표상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예지계, 물자체라고 불리는 transcendent한 영역은 다룰 수 없게 된다. 이는 종래 형이상학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작업이었으며, 외부 대상이 인식되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 소박실재론 등의 독단적 주장들에 대한 강력하고도 혁신적인 비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항상 칸트에 관한 글들을 읽을 때면 "칸트는 대체 transcendental한 영역에 속해 있는 '인식구성틀' 혹은 '인식조건'을 무슨 자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transcendent한 영역은 물자체의 영역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당하게 다룰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은 매우 옳아 보인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무의미하다."라는 그의 말은 이 점에서 아주 잘 이해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식조건'은 어떠한가? 우리의 인식조건이 칸트가 말한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장해 줄만한 어떤 근거가 있는가? 이 인식구성틀에 대한 이론이 종래의 형이상학 이론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없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이 점에서 칸트 보다 나아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언어(사고) 사이에 논리적 동형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논리적 동형성(혹은 그림형식Pictorial form)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도 중요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직전 명제가 더 멋있어 보인다. 명제 7. 바로 전에 나오는 명제 6.54.는 다음과 같다.


[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작업마저도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가 한 작업은 근본적인 층위에서 칸트의 작업과 동일하다. 말할 수 있는 영역(이는 칸트에게서는 현상계)과 말할 수 없는 영역(칸트의 예지계)를 나누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칸트보다 덜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더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작업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칸트는 말이 너무 많았다. 말이 많아서 책을 두껍게 썼으며, transcendental한 영역에 대해서도 신나게 다루면서 자신의 '형이상학'을 전개했다. 이는 그다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가 제시한 인식조건을 하나의 '가능한 이론적 구조'라고 상정하는 경우에는 가능하다. 인식구성틀을 일종의 샘플로서 제시했다고 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다.